내가 이 일을 하는 이유는 / Why I Do This Work
《1. 그 단어 하나에서》나는 초등학교 4학년이었다.열 살 즈음의, 아직 세상의 구조도 모르던 때.그 무렵, 우연히 듣게 된 단어 하나가 있었다.“원더우먼.”그 단어를 처음 들었을 때,나는 그게 무슨 뜻인지조차 알지 못했다.‘우먼’이 여자라는 뜻이라는 사실마저 몰랐던 시절이었다.하지만 그 단어는 이상하리만치 뇌리에 깊게 박혔다.한 번 들은 뒤로는 쉽게 잊히지 않았다.아니, 그 단어는 잊히는 법이 없었다.뜻도 모른 채,나는 그 단어를 자꾸 되뇌곤 했다.입으로 중얼거릴 때마다묘한 기분이 들었다.뭐라고 말하긴 어려웠지만,누군가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기분.지금 생각해 보면,그게 아마 내가 처음으로 성에 눈을 뜬 순간이었던 것 같다.보통은 또래 여자애들이나 선생님처럼현실에 있는 누군가에게 끌리는 게 자연스러웠겠지만,내 경우엔 그게 아니었다.내게 그 감정을 처음 일으킨 건,‘원더우먼’이라는 단어 하나였다.그 시절엔 인터넷이 없었다.내가 원더우먼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던 건텔레비전과 신문,그리고 엄마 손을 잡고 가던 동네 미용실에 놓여 있던 여성 잡지 정도였다.신문에서 그녀가 나오면 오려서 스크랩해 두었고,미용실 잡지에서라도 모습을 발견하면어른들의 눈을 피해그 페이지를 몰래 찢어오기도 했다.지금 생각해 보면,그게 집착의 시작이었다.나는 원더우먼이라는 존재를 찾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2. 좆 된 인생, 끝까지 남은 것》 그때의 나는 딱히 뭔가를 잘하는 사람이 아니었다(솔직히 말해서, 지금도 마찬가지다).공부도, 게임도, 인간관계도 전부 서툴렀다.딱히 남들보다 앞서는 재능 같은 건 없었다.어렸을 땐 개그맨이 되겠다고 했고,철권을 좋아해서 게임 개발자가 될 거라고 했고,성우가 되겠다고도 했다.그때는 진심으로 내가 뭔가 될 줄 알았다.그냥, 그렇게 믿고 싶었다.하지만 막상 그 모든 걸‘시험’이라는 현실 위에 올려보면결과는 항상 뻔했다.나는 평범했다.아니, 평범 측에도 미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지금에 와서 돌아보면,그 모든 꿈을 정말로 원했던 것도 아니었다.그저 남들보다 나은 재능 하나쯤 있으면그걸 믿고 조금은 덜 불행한 인생을 살 수 있지 않을까,그 정도의 욕심이었다.희망이 아니었다.착각이었고, 욕심이었다.그리고 20대의 끝자락,나는 완전히 알게 됐다.내 인생은 완전히 좆 됐고,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걸.고졸에,기술도,특기도,재능도,확신도,미래도 아무것도 없었다.다만,여전히 원더우먼의 19금 패러디를 검색하며컴퓨터 앞에 앉아 자위를 하는 나만 남아 있었다.다른 모든 건 변하고, 사라져도원더우먼에 대한 왜곡된 성욕만은사라지지도,질리지도,멈추지도 않았다.예전에 읽었던 하루키 소설의 한 문장이 떠올랐다.“사람은 물에 빠지면 물에 대한 끔찍한 트라우마가 생기는데,어째서 여자한테 빠지면 그런 트라우마는 안 생기냐고.”그런 말이었던 걸로 기억한다.나도 그랬다.나는 원더우먼에 지독하게 빠졌지만,아무리 오래 붙잡고 있어도한 번도 지겨운 적이 없었다.그건 팬심이니 애정이니 그런 것 따위가 아니었고,욕망이라는 말로도 부족했다.그건, 내가 가진 유일한 무언가에 대한 집착이었다. 《3. 끝도 없이 서 있던 벽 앞에서》 그 시절의 나는그저 욕망을 소비하며 살아가는 사람이었다.어떻게든 이 장르를 좋아하는 사람들과온라인에서 몇 마디를 주고받으며,그 안에서 서로의 망상과 판타지를 교환했다.그게 전부였다.그게 전부였고,그조차도 나에게는 겨우 붙잡고 있는 유일한 연결선이었다.사회는 나를 원하지 않았다.정규직?어딜 가도 나 같은 사람을 뽑아주는 곳은 없었다.그래서 난신촌 고깃집에서 새벽 다섯 시까지 불판을 닦거나,호프집에서 서빙을 하거나,계약직, 단기 알바, 잡다한 일들을 전전하며숨을 쉬는 대신 시간을 넘겼다.그렇게 번 돈으로외국의 원더우먼 패러디 영상을 사거나 공유하며,컴퓨터 앞에 앉아 혼자 그것들을 틀어놓고자위를 했다.부끄럽다 말할 수도 있겠지만,사실 그조차도 내겐 삶의 이유였고, 전부였다.엉성한 영상들이었다.어설픈 연기, 조악한 의상, 형편없는 시나리오.하지만 나는 어떻게든, 돈이 아깝다는 이유만으로라도 끝까지 봤고 자위를 했다.그리고 현자 타임이 오고 나서야,비로소 머릿속에 떠오른 감정을 붙잡고 하나씩 분석하기 시작했다.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아잇, 시발… 내가 만들어도 저거보단 낫겠다.”그건,패배자의 마지막 자기 위안 같은 거였다.나도 안다.내가 뭘 할 수 있겠는가.영화 관련 학교를 나온 것도 아니고,연출을 배운 적도 없고,하다못해 관련된 알바 한 번 해본 적조차 없었다.무엇보다 돈도 없었고.그 모든 생각은 딱 거기까지였다.‘내가 뭘 만든다’는 발상 자체가, 그땐 감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무엇보다나는 나 자신에게 아무런 믿음도 없었다.그런데도 이상하게,‘내가 만들면 더 나을 것 같다’는 허황된 자신감 하나만큼은진짜처럼 느껴졌다.나는 그 화면들을 멍하니 바라보며핀트를 완전히 잘못 잡고 있다고 생각했고,분명 내가 더 나을 거라 생각했다.그게욕망 때문인지,좌절 때문인지,혹은 그냥 우울한 자위의 결과물인지 모르겠다.아마 지금도 전부는 모를지도 모른다.다만 그 시기의 나는욕망 앞에 무기력한 채,그저 소비하고,불만족하고,그러면서도 말하지 못한 채입을 다문 사람일 뿐이었다.하지만…현실의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이내 앞에높고 무심하게 서 있었다.해보기도 전에 지쳐버리는 느낌...도전이라는 단어조차 웃음거리처럼 들리던 시기.나는, 그냥 그런 사람이었다.내가 할 수 있는 건 망상과 자위뿐이었다.그리고 그마저도, 스스로를 겨우 붙잡기 위한 방식이었다. 《4. 그날, 나는 죽었다》 정확히 왜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다만 그날, 나는 한낮의 버스를 타고 있었고버스는 한강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그때 버스 안 풍경은 아직도 또렷한데.몇몇 승객들이 창문을 열어 두었고,그 틈으로 불어온 따스한 바람이버스 안을 상쾌하게 만들고 있었다.나는 손잡이를 잡고 서 있었다.그 바람을 얼굴로 받으며, 평화로운 기분이 들었고 나른하고 졸린 느낌이 들었다.노약자석에 앉아 있던 할머니,하교 시간이 아닌데도, 땡땡이를 친 건지 교복 차림으로 버스에 탔던 여고생,햇살에 앉아서 졸고 있던 아저씨.그 모든 게 한 장의 사진처럼 아직도 선명하다.그리고 다리가 무너졌다.비유가 아니다.정말로 다리가 무너졌고,버스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그 거대한 다리 위에서 한강으로순식간에 빨려 들어갔다.추락하는 버스 안에서,모든 게 뒤엉키는 그 순간,내 머릿속에선 주마등처럼수많은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다.그런데 이상하게도나는 단 하나의 생각만을 붙잡고 있었다.가족도, 부모님도 친구도 아니었다.그 순간, 오직 내 머릿속에 든 가장 큰 후회는"내가 만들었어야 했다. 적어도 시도라도... 적어도 한번은 시도라도 했어야 했는데."한강 물속에 빠진 나는 발버둥도 치지 않았다.가라앉는 내 손을 바라보며, 이미 늦어버린 일들을그저 후회할 뿐이었다."내 손으로 만들어 봤어야 했는데...적어도 한 편, 한 편 정도는 내 손으로 시도해 보고 죽었어야 했는데...!”다른 건 아무 상관 없었다.지금까지 망쳐온 인생도다 사라져도 상관없었다.그거 하나는,내가 했어야만 했다.그리고 나는,꿈에서 깨어났다.정말 드라마처럼,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순간,나는 내가 지금 깬 건지,아니면 죽은 건지구분할 수 없었다.문득, 구운몽이 떠올랐다.꿈속의 나비가 나인지,나비의 꿈이 지금의 나인지.한강에 추락해 죽은 내가 현실이고,깨어난 지금의 내가오히려 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사람들은 말할지도 모른다.“성수대교 붕괴 같은 사건을 겪은 세대니까, 그런 꿈을 꾼 거겠지.”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하지만 나는 안다.그날 분명히,나는 한강에 추락해서 죽었다. 《5. 기회가 온다면》 여기까지 읽으면,사람들은 마치 이게 영화처럼 흘러갈 거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꿈에서 깨어나고,무언가를 깨닫고,록키 영화처럼 화면엔 땀을 흘리며 트레이닝 날짜들이 슉슉 넘어가고,나는 멋지게 첫 영화를 기획하고,뭔가를 해내는 사람처럼삶이 전환점에 들어선다고.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꿈은 강렬했지만,눈을 떠보면 언제나 똑같은 나날이었다.나는 여전히 불안정했고,여전히 방황했고,여전히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다만,그 꿈이 내 머릿속에서 사라진 적은 없었다.특별한 건 없었다.그냥,살면서 문득문득 떠올랐다.한강으로 떨어지던 그 순간,내가 시도하지 못한 것에 대한 절망,그리고 후회.그 감정은내 무의식 어딘가에 깊이 가라앉아 있었다.지하철을 기다리다가도,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집에 혼자 걸어 돌아오는 길에도,컴퓨터 앞에서 예전처럼 또 다른 패러디 영상을 틀어놓고 자위를 한 뒤,어둠 속에서 웅크린 채 잠들기 전에도.‘내가 만들었어야 했는데.’‘나에게 기회만 온다면...’그런 생각들을소리 내어 말한 적은 없지만,언제부턴가마음속엔 늘 그런 식의 생각이 앉아 있었다.그건 거창한 각오라기보단,그냥 마음 어딘가에 눌어붙은 찌꺼기 같은 거였다.언제였는지,어떤 식이었는지지금 생각하면 그마저도 흐릿하지만나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왜냐하면,그날 내가 한강에 떨어져 죽었다는 걸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으니까.지금도 나는 여전히 불안정하고, 여전히 흔들린다.모르는 것투성이고, 그저 매일을 운에 맡긴 채 살아간다.그래도 오늘도, 습관처럼 화면 앞에 앉는다.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아무도 보지 않는 어둠 속에서나는 그냥, 또 하나를 만든다.여전히 어설프지만,그때 만들지 못했던 것 같은 뭔가를조금씩 시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