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즈니스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 우리 장르에선 짧고 빠른 시간 안에 작품을 양산하는 것이 중요하고 이것이 중요한 성공의 열쇠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저 빠르게만 만드는 것이 아닌 그 속에서 고객이 납득할 수 있는 디테일(작품의 내러티브, 캐릭터, 미술, 소품 등)이 살아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 이러한 기준점을 충족시켜주는 레퍼런스 같은 작품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 소개할 크리스티나 카터(Christina Carter)의 원더우먼 XXX (2012)이다.
이 작품은 나에게 "어떻게 독립 서브컬처 성인 영화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라는 끊임없는 고뇌에 대한 답이 되어주었고, 나는 이 작품을 레퍼런스 삼아 '원더우먼 GOLD'를 만들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앞으로 만들어질 나의 미래의 작품들에게도 영향을 미칠 것이기에 나는 이 작품을 총괄 프로듀서의 입장에서 비즈니스적인 관점으로 바라보고 여러분께 소개해 보는 시간을 가질 것이다.
1. 캐릭터

원더우먼 / 다이아나 프린스 - 크리스티나 카터 (Christina Carter)
미네르바 - 파리스 케네디 (Paris Kenndy)
스테파니 트레버 - 타샤 레인 (Tasha Reign)
아마존 스피릿 - 랜디 무어 (Randy Moore)
원더우먼 XXX에는 오직 4명의 배우(캐릭터)만 등장하고 이외에는 흔한 엑스트라 한 명 나오지 않는다. 아마존 스피릿 역으로 나온 랜디 무어 같은 경우, 일종의 카메오로 에피소드 4에서만 잠깐 등장하기 때문에 사실상 크리스티나 카터, 파리스 케네디, 타샤 레인 이 세 명의 배우가 대부분의 러닝타임을 담당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타사 레인을 제외한 나머지 세 명의 배우들은 다른 작품에서 모두 원더우먼 역할을 맡은 재밌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6개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진 작품에 4명의 등장인물만 나오면 지루하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렇지 않다. 오히려 이것이 불필요한 내러티브나 인물을 쳐낸 과정이라 할 수 있고 오롯이 장르의 본질과 관객의 니즈에만 집중한 선택이라 볼 수 있다. 무엇보다 가뜩이나 빠듯한 제작비를 운영해야 하는 제작자의 입장에서는 엑스트라 섭외 등의 추가적인 지출을 아낄 수 있으니 쓸데없는 부분에 힘을 뺀 현명한 프로덕션 운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2. 스토리

국가에 배신당한 전 과학자 미네르바(파리스 케네디)는 국가를 상대로 테러를 실행하기로 결정하고 자신의 계획에 가장 방해가 될 것으로 예상되는 안보국 IADC의 수장 스테파니 트레버(타샤 레인)를 납치하게 된다. 트레버의 납치 소식을 들은 다이아나는 스테파니를 그리고 세상을 구하기 위해 원더우먼으로 변신해 출동한다.
간결하면서 전 세계 누구나 이해하기 쉬운 스토리라인이고 이것이 지난 칼럼에서 얘기한 우리 장르의 베스트 스토리이다. 이렇게 해야 관객의 쉬운 몰입을 끌어낼 수 있고 로컬을 넘어 글로벌 마켓으로까지의 진출이 가능하다.
앞서 캐릭터에서의 예시처럼 우리 장르가 메인스트림과 상반되는 재밌는 점이 몇 가지 있는데, 그중 하나가 지금과 같은 내러티브의 전개 방식이라 할 수 있다. 메인스트림에선 클리셰가 많을수록 진부하다고 욕을 먹지만 여기선 그 반대이다. 오히려 클리셰대로 진행되어야 고객을 만족시킬 수 있는 게 우리 장르의 특징이랄까.
그 이유는 장르를 다루는 방식에 있는데, 다수의 공감과 재미를 추구하는 방식이 메인스트림이라면 우리는 철저히 관객과 1:1로 만나 호흡하기 때문이다. 이는 소설이나 고전 게임을 떠올려보면 이해하기 쉬운데, 텍스트로만 이루어진 소설이나 한낱 도트로 이루어진 고전 게임이 유저의 상상력과 더해지는 과정을 생각해 보라. 그저 활자와 낮은 비트의 그래픽이 유저의 상상 안에서 어우러져 눈물을 쏙 빼놓을 수도 있는 것이고, 이는 우리 장르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작품과 유저의 상상력이 합쳐졌을 때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 우리 장르고 그러기 위해서는 예측 가능한 상황이 예측 가능한 때에 나와주어야 한다.
(재밌는 영화나 넷플릭스를 보고 가족과 애인에게 소개하여 같이 공감하며 즐길 수 있겠지만, 지극히 사적인 영역인 우리 장르를 그것과 같은 방식으로 소비할 순 없다. 장르를 만드는 제작자라면 반드시 이 차이를 인지해야만 한다.)
3. 상황

내가 우리 장르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3대 요소가 있는데 바로 "캐릭터, 상황, 공간"이다.
앞뒤가 척척 맞아떨어지는 깔끔한 스토리보다는 순간과 우연이 존재하는 상황과 공간이 관객의 상상을 자극하고, 이것이 나에게 있어서 적어도 스토리보다 먼저 고려해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한다.
원더우먼 XXX에서는 미네르바가 스테파니 트레버를 납치하고 (스티브 트레버를 남성에서 여성으로 바꾼 것도 재밌다) 원더우먼이 스테파니를 구하기 위해 미네르바와 맞서게 된다.
미네르바는 매드 사이언티스트라는 설정답게 자신이 직접 개조한 레이저건이나 신체를 강화하는 기계장치로 원더우먼과 맞서보지만 이것들은 전능한 원더우먼 앞에 소용이 없다. 물리적인 공격이 통하지 않자 미네르바는 스테파니를 세뇌해 원더우먼을 사로잡게 하고 스테파니를 공격할 수 없는 원더우먼은 결국 미네르바에 사로잡히게 되어 고문과 농락 끝에 무너져 내리고 만다.
이렇듯 원더우먼 XXX에서 보여준 내러티브의 전개 방식이 스토리 보다 상황을 우선시하는 장르의 특성인 것이고 내가 우리 장르에서 추구하려는 방향과 일치한다.
4. 미술 및 로케이션 (세트)
앞서 장르의 3대 요소 중 캐릭터와 상황을 살펴봤으니 이제 마지막으로 공간(로케이션 및 세트)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일반 영화 세트>

메인 스트림 영화나 드라마의 세트장은 최대한 현실과 구분이 안 가도록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쉽게 말해 세트티가 나지 않으면 않을수록 좋은 것이기 때문에 많은 돈과 시간(노동력)을 필요로 한다.
<한국 성인 영화>

애초에 세트촬영이란 개념은 따로 없고 대부도 등지의 펜션을 하루 빌려 촬영한다. 미술이라 할 것은 없고 렌트한 시간 안에 허겁지겁 촬영하기 바쁘다.
<원더우먼 XXX>

아마도 캘리포니아 등지의(포르노 촬영이 용이한) 세트장을 렌트해서 촬영했을 것이다. 리얼리티보다는 인물에 집중할 수 있는 연극적 세트 구성을 선택했다.
원더우먼 XXX는 다른 것도 잘했지만 공간, 그중에서도 세트 미술을 참 잘했다. 마치 심연과도 같은 검은 배경에 각 로케이션에 맞는 키포인트 아이템을 주어 특정 공간 만의 느낌을 살렸다.
나는 이 작품을 보고 '원더우먼 GOLD'의 미술 디자인을 떠올릴 수 있었고 그것 뿐만 아니라 앞으로 만들어갈 나의 전용 세트장의 전반적인 구성을 계획할 수 있었다.
공간 파트에서도 역시 우리 장르만의 차이점을 살펴볼 수 있는데, 메인스트림이라면 할 수 없는(하지 않는) 조촐한 세트 구성으로도 극을 완성시키는 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의 나에게 주는 의미는 남다른데, 그 이유는 내가 이 장르에 가진 철학적 개념의 마지막 퍼즐을 맞추었다고 봐도 무방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성인 배우풀은 미국이나 일본과 비교했을 때 비교하기가 무색할 정도로 그 깊이가 얕다. 하지만 이는 앞서 말한 캐릭터로 커버가 가능하다. 무슨 말이냐 하면, 린다 카터는 그 자체로 아름다운 여성이지만 원더우먼 코스튬을 입지 않는 그녀는 나에게 그 어떤 의미도 지니고 있지 않다. 오로지 원더우먼으로서의 린다 카터 만이 나에게 의미를 가지게 하고 상상하게 만든다. 이것이 캐릭터의 개념이란 것이고 내가 지난 십수 년간 직접 작품으로 실험하고 증명한 것이다.
스토리 역시 우리 장르에서 어떻게 전개시켜 나가야 하는지 경험과 반추를 통해 알게 되었다. 메인스트림에서 참고할 부분은 분명 있으나 그 방식과 트렌드를 흉내 내려 해선 안 되며, 그것보다는 순간과 우연이 존재하는 상황(찰나)이 우리 장르에서 더욱 우선시해야 할 것이다.
캐릭터와 상황 두 가지 개념은 작품을 직접 만들고 다른 사람들의 작품을 참고삼아 확실히 그 개념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공간에 대한 부분이 쉽지 않았는데, 딱히 레퍼런스로 삼을만한 작품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메인스트림의 세트 환경은 우리가 흉내 내기조차 어려운 스케일을 자랑한다 (우리의 제작비가 5천만 원이라면, 그들은 소품 하나에 그 금액을 사용할 것이다).
반면 장르에서는 지나치게 엉성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가령 한국 성인 영화를 예로 들면 공간과 미술에서 답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그냥 포기하고 모든 손을 놓아버린 모양새다. (여태껏 국내 성인 영화 바닥에서 스태프로 일하면서 공간에 대해 심도 있게 고민하는 감독을 단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다) 그렇기에 대충 이쁘다고 생각되는 펜션을 빌려 공간은 배제한 채 촬영 한다.
나에게 필요한 공간은 메인스트림 처럼 인물에 집중할 수 있게 해주고 시청에 방해가 되지 않으면서도 예산은 우리 장르에 맞는 공간이었다. 말이 안 되는 소리란 걸 알지만 어딘가에는 분명 존재할 레퍼런스를 찾아야 했는데 <밸런스 오브 파워> 와 <원더우먼 XXX>에서 비로소 내가 찾던 답을 찾은 것이다.
마치며
지난 칼럼에서 '론 산티아고' 감독의 <밸런스 오브 파워>로 이상적인 장르의 모습을 이야기했다면, 이번엔 <원더우먼 XXX>로 실제 업계의 작품을 예시로 들어 비즈니스적인 관점으로 풀어보았습니다.
두 작품 모두 저에게 깊은 인사이트를 남겼으며 이를 바탕으로 성인 영화 시장의 불모지인 한국에서 어떻게 독립 장르로 버티고 살아남아 토대를 마련해야 할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기회가 되면 지금과 같은 업계의 이야기를 예로들어 이 장르에 대한 저의 생각과 철학을 이야기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TMI

재밌는 것은 제가 현실적인 장르의 이상향으로 삼은 크리스티나 카터 여사의 <원더우먼 XXX> 이후의 행보입니다.
기존 홈 비디오 형식의 작품에서 큰 변화를 주어 외부 프로듀서와의 공동 작업으로 깔끔한 영화적 연출과 군더더기 없는 디자인의 <원더우먼 XXX>를 완성했지만, 기존의 방식 대비 지나치게 더딘 작업 기간과(촬영부터 편집 이후의 발매까지가 1년여 정도 걸렸습니다. 에피소드를 6개로 늘리고 늘린 이유가 여기 있었을 거예요. 어떻게든 기회비용을 만회했었어야 했을 테니까요) 높은 제작비 대비 부진한 수익 등의 이유로 다시 이전 홈 비디오 형식의 시절로 회귀하고 맙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크리스티나 카터 여사가 이 지점에서 인내하고 문제를 해결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궁금함이 남아요. 분명 이 장르에 없었던 멋진 스튜디오가 탄생했었을 거라고 보거든요.